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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건설경제, 15.02.09 談合과 協議의 경계선

Author
익명
Date
2015-03-04
Views
1249

출처: http://www.cnews.co.kr/uhtml/read.jsp?idxno=201502061716094230384&section=S1N12&section2=S2N45

 

[시론] 談合과 協議의 경계선

이복남(서울대 건설환경연구소 산학협력중점교수)

  

국내 공공공사의 담합은 마치 뜨거운 감자와 같다. 아담 스미스 이론에 따르면 동종의 사업자는 자리만 함께해도 담합(일종의 가격 카르텔)이라 주장했다. 국내법과 제도에서는 동종의 사업자 간 협력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얼핏 보면 극단적인 차이다. 아담 스미스의 카르텔 주장은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모임 성격이 강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감대 형성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잇단 공공공사 담합 판정과 달리 지난달 18일 대구지법은 전혀 다른 판정을 내렸다.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모임만으로 담합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법에서 보장된 사업자의 회동 자체를 담합을 위한 모임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요지다.

담합과 협의를 위한 모임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국민들은 담합을 부당이득을 위한 가격 담합으로 보는 게 사실이다. 국민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국내 28개 주요 산업 중 건설산업의 이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담합의 목적성과 정체성이 사라진 곳은 입찰 현장이다. 담합을 피하는 유일한 수단(?)이 입찰 기피라는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국내 건설시장의 현재는 발주자가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환경이다. 공급자에 비해 수요 시장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현안 이슈로 제기된 대부분의 입찰담합은 지난 2009년과 2010년 사이에 진행된 공사들이다. 당시는 단기간 내 공사 물량을 소화시켜야 하는 다급함이 발주자를 지배했었다. 국가와 발주기관이 의도적으로 담합을 유도하는 환경을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급자가 시장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수요자 그룹이 인위적으로 물량을 배분하는 방안을 도입했다. 정부의 책임부처가 2015년 계획에서 담합의 빌미를 줬던 ‘1사1공구’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점에서도 이런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문제 해결은 주도권을 가진 쪽에서 해야 실효성이 있다. 현재는 수요와 공급 균형에서 수요자 일방통행이 가능한 시대다.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의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특히 담합이나 카르텔 등 고전적 해석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 한때 세계경제의 생사를 가늠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던 게 석유 가격이었다. 1960년대에 결성되었던 중동국가 중심의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 생산국의 카르텔이 본질이다. 일일 석유 수출 증감을 통해 가격 통제 권한을 행사했던 공인된 국제기구다. 최근 석유값 하락은 OPEC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OPEC의 석유가격 통제는 일일 수출량 400만배럴이었다. 이 힘을 무기력하게 만든 게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량이다. 미국의 셰일가스 일일 생산량 조절이 350만배럴을 넘기면서 전 세계 석유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힘의 논리가 또 다른 힘에 의해 카르텔이 붕괴되고 있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공공공사에서 담합에 대한 해결책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문제의 단순 해결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대수술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건설의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폄하시키고 있는 입찰담합 문제 해결의 첫 단추는 국민에게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 혁신으로부터 시작해보자. 현재의 부정적 이미지로는 잘못을 고치는 노력에 비해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책 중 전율을 느낀 책이 있다. 중국인이 쓴 <하바드의 새벽 4시 반(Harvard’s 4:30 AM)>이다.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베이징대학의 전기불이 24시간 켜져 있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벽을 넘어서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새삼 느꼈다.

국내 건설이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국건설은 정부와 국민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달라는 목소리로 일관해 왔다. 건설도 이제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입찰담합이 과거의 관행과 관습이었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호소만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건설의 가치를 안다면 국민을 상대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세계 6위권을 넘어 챔피언 산업으로 올라 국민경제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향수나 현실에 대한 절망에 빠져 있기에는 한국건설의 잠재력이 너무 크다. 미래를 멀게만 볼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담합과 협의의 경계선을 판가름하는 것은 건설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다. 건설이 안으로 수익성을 회복하고 밖으로 시장을 넓혀가기 위해서는 담합이란 관문의 문턱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한국건설을 기다려 주는 시장은 없다. 다만 만들어가야 할 뿐이라는 사고가 필요하다.